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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 루틴 (실패 패턴, 3단계 루틴, 자기효능감)

by 엘리자56 2026. 5. 28.

루틴을 만들 때마다 사흘을 못 넘겼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특성을 가진 분들에게 '매일 똑같이'를 요구하는 루틴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 옷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이유와, 실제로 효과를 본 3단계 루틴 방식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입니다.(여기서 루틴은 "매일 반복하는 나만의 습관 순서"를 의미합니다.)

수십 번 반복된 실패 패턴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유튜브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모닝 루틴'을 보고 나서, 그날 밤 공책에 빼곡하게 계획을 적었습니다. 6시 기상, 30분 스트레칭, 직접 만든 아침 식사, 하루 계획 수립까지. 처음 이틀은 신기하게 잘 됐습니다. '이번엔 다르다'는 뿌듯함도 잠깐이었고, 사흘째 되던 날 알람이 울려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찾아왔습니다. 결국 루틴 전체를 건너뛰었고, '또 실패했다'는 자책이 밀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수십 번 반복됐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의지력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의지력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루틴의 설계 방식 자체였습니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 중 하나가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 저하입니다. 실행기능이란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실행하고, 충동을 조절하는 뇌의 관리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기능이 에너지 수준에 따라 크게 흔들리기 때문에, 어떤 날은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자체가 벅찬 상태가 됩니다. 일반적인 루틴은 에너지가 70~80% 사이에서 안정적이라는 전제 하에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ADHD 특성을 가진 분들은 어떤 날은 120%, 어떤 날은 20%인 경우가 있습니다. 120%인 날을 기준으로 설계된 루틴을 20%인 날에 그대로 적용하려 하면, 실패는 예정된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3단계 루틴이라는 발상의 전환

루틴을 하나로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써보니 루틴을 세 가지 버전으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방식은 게임의 난이도 조절과 비슷합니다. 같은 스테이지를 쉬움, 보통, 어려움으로 나눠서 그날그날 고르는 것처럼, 루틴도 세 가지 버전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겁니다.

  • 이상적인 루틴: 컨디션이 정말 좋을 때,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담은 버전. 현실성보다 이상향에 초점을 둡니다.
  • 현실적인 루틴: 평소 상태에서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버전. 이상적인 루틴에서 부담스러운 항목을 덜어낸 형태입니다.
  • 최소 루틴: 컨디션이 바닥일 때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버전. 세수, 양치, 물 한 잔도 충분합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가장 중요한 건 최소 루틴을 정말 최소로 설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도는 어떤 상태에서도 할 수 있다'는 수준까지 내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너무 적어서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줄여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또 하나, 세 가지 버전 모두 기본 흐름은 비슷하게 가져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화장실 → 식사 → 외출 준비라는 구조는 유지하되, 각 단계의 밀도를 버전별로 다르게 가져가는 방식입니다. 구조가 달라지면 선택 자체가 인지 부하(Cognitive Load)를 유발합니다. 인지 부하란 뇌가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늘어나면서 생기는 정신적 피로를 뜻합니다. 루틴 선택 자체가 또 하나의 과제가 되어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자기효능감을 쌓는 방식으로서의 루틴

루틴이 왜 계속 실패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있습니다. 의지력 부족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환경 설계의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루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손상의 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효능감이란 심리학자 앨버트 밴두라(Albert Bandura)가 제시한 개념으로, '나는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루틴을 반복해서 실패하면 이 믿음이 깎입니다. 그리고 자기효능감이 낮아지면 다음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악순환이 생깁니다. 실제로 자기효능감과 루틴 지속성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작은 성공 경험이 반복될수록 행동 지속력이 높아진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3단계 루틴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최소 루틴을 해냈다면, 그날은 실패가 아닙니다. '겨우 이것밖에 못 했다'가 아니라 '오늘 컨디션에 맞는 루틴을 골라서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쌓이면 자기효능감이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현실 루틴, 이상적 루틴을 해낼 수 있는 날이 늘어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됩니다.

ADHD를 포함한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관점에서도 이 접근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경다양성이란 ADHD, 자폐 스펙트럼 등 뇌의 작동 방식 차이를 결함이 아닌 다양성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 관점에서 루틴 실패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미스매치(Mismatch) 문제에 가깝습니다.

3단계 루틴을 실제로 시작하는 방법

막상 시작하려 하면 막막할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세 가지 버전을 한꺼번에 만들려다가 오히려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1주차에는 이상적인 루틴만 씁니다. 현실성은 신경 쓰지 말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적습니다. 2주차에는 그 목록을 보면서 부담스러운 항목을 하나씩 줄여 현실적인 루틴을 만듭니다. 3주차에는 컨디션이 최악일 때도 할 수 있는 것만 남겨 최소 루틴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한 번에 모든 루틴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침 루틴부터 먼저 완성하고, 자리를 잡으면 저녁 루틴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ADHD 치료를 연구하는 국내외 임상 현장에서도 행동 변화는 작은 단위부터 점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지속 가능성을 높인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자기 관찰(Self-monitoring)도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집니다. 자기 관찰이란 자신의 상태, 행동, 반응을 의식적으로 살피는 능력을 말합니다. 매일 아침 '오늘 내 컨디션은 어느 수준인가'를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자기 관찰 훈련이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에너지 패턴을 파악하게 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루틴을 고르는 습관이 결국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요.

루틴을 지키지 못했을 때 자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실패의 원인이 의지력이 아니라 설계 방식에 있었다면, 자책보다는 설계를 바꾸는 쪽이 맞습니다. 3단계 루틴은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어떤 날에도 아예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실행이 쌓이면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 진짜 목표입니다. 완벽한 루틴보다 나에게 맞는 루틴이 훨씬 오래 간다는 건, 제가 직접 겪어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ADHD 관련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전문 의료기관을 찾아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4GI7l2F9G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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